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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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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454회 작성일 08-09-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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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8월 3일 작고한 러시아의 양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74년에 소련 당국에 의해 국외로 추방된 뒤 1994년까지 미국 버몬트 주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1978년 6월 8일 하버드 대학의 초청으로 이 대학 졸업식에서 행했던 연설문을 〈녹색평론〉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비록 30년이 경과했지만 근대 서구적 가치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는 이 연설문의 메시지는 소위 서구 자본주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월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내용이 길지만 꼭 읽어보면 좋을 것아 여기에 올립니다.     



분열된 세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나는 이 유서깊고 저명한 대학의 327회 졸업식에 참석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졸업하는 모든 분께 축하를 드립니다. 하버드의 모토는 ‘베리타스’, 즉 진리입니다.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은 이미 발견하였고, 다른 이들은 인생을 살아가며 알게 되겠지만, 우리의 집중이 느슨해지면 당장 진리는 우리가 계속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환상을 남겨놓고 우리에게서 달아나 버립니다. 이것이 많은 불화의 근원입니다. 또한 진리는 달콤한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거의 예외없이 쓰디씁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에는 약간의 진리가 들어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적이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서 드립니다.


3년 전 나는 미국에서 거부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 말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분열은 금방 눈에 띕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미 서로를 파괴할 능력을 갖고 있는 양대 세력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분열은 너무나 자주 이러한 정치적 개념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외교적 중재나 군사력의 균형을 통해서 위험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분열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깊으며 한눈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갈등이 존재합니다. 이 깊은 중층적 분열은 그만큼 많은 재앙을 품고 있습니다. 왕국은 분열된 채로 있을 수 없다는 오래된 진리가 말하는 대로입니다.


제3세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3개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보다 더 많은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멀리 있어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모든 오래되고 뿌리깊이 자족적인 문화는, 특히 그것이 광대한 지표면에 걸쳐 있을 때, 서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경이로움에 찬 하나의 자족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중국, 인도, 무슬림 세계, 아프리카를 이 범주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천년 동안 러시아는 그런 범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공산주의에 붙들려 있는 러시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서구는 러시아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따라서 러시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체계적인 과오를 범해왔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일본이 점차적으로 서구식 방식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반면에, 이스라엘은 내 생각에는 국가체제가 근본적으로 종교에 연결되어 있다는 그 결정적인 상황 때문에라도 서구의 일부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근대 유럽이라는 조그만 세계가 지구 전역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저항을 받지 않고, 피정복 민족들의 삶의 방식에 경멸감을 가지고 쉽게 식민지를 차지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 모두가 지리적 제한이 없는 압도적인 성공으로 보였습니다. 서구사회는 인간적 독립성과 힘의 승리 속에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20세기가 이 서구사회의 허약성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정복들이 단명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드러났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런 정복을 유도한 서구적 세계관의 결함을 가리킵니다. 옛 식민지 세계와의 관계는 이제 극단적으로 역전되어 서구세계는 자주 과도한 비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직 옛 식민지 국가들이 서구에게 제시할 청구서의 금액을 산정하기 어렵고, 마지막 식민지뿐만 아니라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해도 서구가 그 셈을 청산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위를 점한 자의 끈질긴 맹목성으로 서구는 지구상의 모두가, 이론적으로 최선이고 실천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현재의 서구 시스템 수준까지 발전하고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서구 이외의 세계는 전부 일시적으로 (사악한 지도자, 심각한 위기, 자신들의 야만성이나 몰이해에 의해) 서구의 방식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다고 계속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개념은 다른 세계들의 본질에 대한 서구의 몰이해와 모두를 서구의 척도로 재려한 잘못의 결과입니다. 지구의 진정한 발전은 이런 모습과 별로 닮지 않은 것입니다. (중략)


근대 서구국가들이 형성될 때, 정부는 사람에게 봉사해야 하고,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산다는 것을 원칙으로 선언하였습니다(예컨대 미국 독립선언문을 보십시오). 이제 지난 몇 십 년간의 기술적, 사회적 진보로 드디어 그러한 희망, 즉 복지국가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지금까지 바라던 자유와 물질적 재화가 허용되었습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행복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타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상으로는 어쨌든 행복의 성취를 보증할 큼의 재화가 구비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심리학적 사실이 간과되었습니다. 즉 더 많은 물건과 더 나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그것을 향한 투쟁이 많은 서구인들의 얼굴에 근심과 우울을 - 물론 습관적으로 깊이 감추고는 있지만 - 새겨놓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고를 지배하게 된 이 치열한 경쟁은 자유로운 영적 발전에 조금도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여러 유형의 국가적 압력으로부터 개인의 독립은 보장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꿈꿀 수도 없었을 만큼의 복지가 허락되었습니다. 이런 이상에 따라 젊은이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육체적 성장, 행복, 여가, 물질의 소유, 돈, 거의 무제한의 쾌락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 누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며 왜, 무엇 때문에 공익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위태롭게 하겠습니까?

생물학조차도 높은 수준의 습관적 안락함은 살아있는 유기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서구사회의 안락한 생활은 그 유해한 가면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서구 사회는 그 목적에 가장 잘 맞는 법률을 존중하는 조직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의 권리의 한계와 옳고 그름은 법체계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기준은 몹시 너그럽습니다. 서구인들은 법을 사용하고 해석하고 조작하는 상당한 기술을 획득했습니다. (중략)


나는 평생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살았습니다. 객관적인 법적 척도가 없는 사회는 사실 끔찍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도 더 높은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합니다. 법조문은 너무 차갑고 형식적이어서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삶이 법적 관계로 짜여있을 때는 언제나 인간의 가장 숭고한 충동을 마비시키는 정신적 범용함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적 조직에만 의지하여 이 위협적인 시대의 시련을 견디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의 서구사회는 선한 행동을 위한 자유와 사악한 행동을 위한 자유 사이의 불평등을 드러내었습니다. (....) 사실 뛰어난, 이례적이고 예상치 못한 창의성을 가진 진실로 위대한 인물은 자신을 내세울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그는 수많은 덫에 걸립니다. 그리하여 민주적 억제력이라는 명분 밑에서 범용성이 승리합니다. (....)


파괴적이고 무책임한 자유에 무한한 공간이 허락되었습니다. 사회는 퇴폐성, 예컨대 포르노, 범죄, 공포물로 가득 찬 영화 등 젊은이들에 가해지는 심각한 도덕적 폭력에 맞설 거의 아무런 방어책을 갖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유의 일부라고 간주되고, 이론적으로 젊은이들의 보지 않을 권리,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에 의해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조직된 삶은 이처럼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유가 악으로 기울어진 것은 점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주인인 인간의 내면에는 본래 어떤 악도 없고, 다만 삶의 모든 결함은 잘못된, 따라서 수정돼야 할 사회체제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최상의 사회조건이 성취된 서구사회에 여전히 많은 범죄가 있습니다. 오히려 빈곤하고 무법적인 소비에트 사회에서보다도 더 많습니다.


언론도 역시 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언론이 자유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십시오. 여기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법조문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곡이나 불균형에 대한 진정한 도덕적 책임감은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자나 신문은 독자와 역사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요? 그들이 부정확한 정보나 그릇된 결론으로 여론을 오도했을 때, 그 결과로 국가적 수준의 실수가 초래되었다 하더라도, 그 기자나 신문이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신문판매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그런 잘못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기자는 항상 무사히 빠져 나갑니다. 그는 태연하게 이전에 한 것과 전혀 반대가 되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여론을 오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는 슬로건에 따라, 테러리스트가 영웅화되거나 국가안보에 관련된 기밀사항이 공개되거나 명사들의 사생활이 난폭하게 침해되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시대의 잘못된 슬로건입니다. 훨씬 가치있는 것은 ‘모를 권리’, 사람의 고귀한 영혼을 잡담이나 무의미한 헛된 이야기로 채워놓지 않을 권리입니다. 노동을 하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과도한 성가신 정보들의 유입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급함과 피상성 - 이것이 20세기의 마음의 질병이며, 다른 어느 것보다도 언론이 앓고 있는 병입니다. 문제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언론에게는 저주입니다. 자기의 본성에 반대되는 일이니까요. 언론은 그저 선정적인 것만을 선택합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서구사회에서 입범과 행정, 사법의 권력을 능가하는 최고의 권력이 되었습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떤 법에 따라 선출된 권력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 권력입니까? 공산국가에서는 기자는 솔직하게 국가관리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서구의 기자들은 누구의 투표로 권력의 자리에 앉았으며, 얼마 동안 어떤 특권을 누리게 되어있습니까?


언론이 엄격하게 통합되어 있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에게는 또 하나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서구의 언론에는 공통의 선호경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판단 유형, 그리고 아마도 공통의 기업적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통제받지 않는 자유가 언론에게는 있지만, 독자들에게는 없습니다. 신문들이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은 주로 자기자신 및 언론의 일반적 경향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 의견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식적 검열이 없어도, 서구에서는 유행에 맞지 않는 생각들은 유행에 어울리는 것들과 까다롭게 분리되어, 금지되지는 않더라도 정기간행물이나 서적에 실리거나 대학에서 전달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의 학자들은 법적인 의미에서 자유롭지만, 유행이라는 우상들에 의해 갇혀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처럼 공개적인 폭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행과 대중적 기준을 따라야 할 필요성 때문에 가장 독립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도 흔히 공익에 기여하거나 집단적 위험을 경고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나는 매우 지적인 사람들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벽지의 작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의 재생과 구원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 나라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미디어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강력한 대중적 편견이 형성되고, 이 역동적인 시대에 위험한 맹목성이 탄생합니다. 하나의 에는 현대세계에 대한 자기기만적인 해석입니다. 그러한 편견은 서구인들의 정신을 화석화된 갑옷처럼 둘러싸서, 그 결과 동구와 동아시아 17개국 사람들의 목소리도 그것을 꿰뚫지 못합니다.


누군가 내게 현 상태의 서구를 모범으로 제시할 것인지 묻는다면 나는 솔직히 부정적인 대답을 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사회를 우리의 이상으로 추천할 수 없습니다. 깊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금 매우 강렬한 영적 발달을 성취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현재의 서구체제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서 내가 열거한 서구사회의 특징들 앞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슬픔을 느낍니다.


반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서쪽에서는 인간의 성품이 허약해진 반면 동쪽에서는 더욱 확고하고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에게 60년간, 그리고 동구인들에게 30년간 우리는 서구의 경험에 훨씬 앞서는 영적 훈련을 겪었습니다. 삶에 대한 복합적이고 치명적인 파괴는 표준화된 서구식 복지가 만들어낸 것보다 좀더 강하고, 깊고, 흥미로운 人性을 만들어냈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 사회가 여러분의 사회로 변한다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개선을 뜻하겠지만 또 어떤 특별히 의미있는 면에서는 사태의 악화를 뜻할 것입니다.


물론 한 사회가, 우리나라가 그런 것처럼, 무법천지의 지옥으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사회처럼 영혼이 없는 평탄한 법률 제일주의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는 인간은 천박한 존재가 됩니다. 수십년간의 폭력과 압제를 겪은 인간의 영혼은 오늘날의 대중적 생활습관 - 불유쾌한 상업광고, TV에 빠져있는 무감각 상태, 음악이란 이름의 참을 수 없는 소음 - 이 제공하는 것보다 좀더 높고 따뜻하고 순수한 것을 갈망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구 도처에 있는 수많은 관찰자의 눈에 보입니다. 서구식 생활방식은 모범이 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관계가 성립했을까요? 어떻게 서구는 승리의 행진으로부터 현재의 무기력상태로 떨어졌을까요? 발달과정에 치명적인 방향전환과 방향상실이 있었을까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서구는 자신이 제창한 의도대로 기술의 눈부신 진보와 손잡고 꾸준히 나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처럼 허약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적 사고의 기초에, 뿌리에 과오가 있다는 뜻입니다. 근대 서구를 지배해온 세계관이 문제입니다. 르네상스에서 태어났고 계몽주의시대 이후 정치적으로 표현된 그 세계관 말입니다.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교의(敎義)의 기초가 되었으며, 합리주의적 휴머니즘, 혹은 인간주의적 자율성 -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힘으로부터도 벗어난 자율 -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르네상스가 도입한 방향전환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중세는 인간의 정신성을 내세우며 육체적 본성을 무섭게 억압한 끝에, 소진되어 자연스러운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 뒤에 우리는 정신으로부터 물러나서 모든 물질적인 것을 과도하게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껴안았습니다. 근대 서구문명은 인간과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숭배하는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버렸습니다. 육체적 안락과 물질적 축적을 넘어서 있는 모든 것, 좀더 섬세하고 고귀한 성질을 띤 모든 다른 인간적 필요와 특성들은 국가와 사회체계의 관심 밖에 버려졌습니다. 마치 인간의 삶이 보다 높은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정치와 사회개혁에 지나친 희망을 걸어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 즉 영적인 삶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삶은 동쪽의 공산당 패거리들에 의해서, 서쪽의 상업주의에 의해서 짓밟혀버렸습니다. 이것이 위기의 본질입니다. 세계의 분열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분열된 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의 유사성입니다.


만일 휴머니즘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면, 그는 죽을 운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운명적으로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인간의 과제는 좀더 정신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일상생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물질적 재화를 획득하는 최선의 방법을 추구하는 것도, 분별없는 소비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항구적이고 진지한 임무수행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여정이 무엇보다도 도덕적 성장의 경험이 됨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출발할 때보다는 좀더 나은 인간으로서 삶을 끝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가치의 척도를 재평가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합니다. 현재의 척도는 놀랄 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대통령의 업적이 돈을 얼마나 벌도록 해주었는가, 혹은 휘발유 공급을 원활하게 해주었는가 따위로 평가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 속에 고요한 자기억제의 정신을 자발적으로 양육함으로써만 인간은 물질주의의 흐름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계몽주의’의 화석화된 공식에 매달려 있는 것은 퇴행적인 일입니다. 그런 사회적 도그마로는 우리 시대의 시련 앞에서 우리가 무력해질 뿐입니다.


우리가 전쟁에 의한 파괴를 면한다 하더라도, 삶의 자멸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가 과연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위에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인간 위에 ‘최고의 정신’이 있는 게 아닐까요? 인간의 삶과 사회가 무엇보다 물질적 확장의 지배하에 놓여있다는 게 옳을까요? 우리의 온전한 영적 삶을 손상시키는 그러한 확장을 조장하는 게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요?


세계가 종말에 다가선 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세계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전환했던 때와 같이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에 도달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정신적 분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비전, 새로운 수준의 삶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세의 상황처럼 우리의 육체가 저주받지 않고, 근대의 상황처럼 우리의 정신이 짓밟히지 않는 삶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 단계로의 인류학적 상승과 유사한 것입니다. 지상의 누구한테도 올라가는 것 말고는 이제 다른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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