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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불쌍히 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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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4,413회 작성일 22-06-2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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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불쌍히 여김

1:40~45

2022. 6/26. 11:00

마음의 차이가 사람의 차이

지난 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세 종류의 만남을 소개했다. 강도들과의 만남(나쁜 만남), 제사장과 레위인과의 만남(만나나마나한 만남),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과의 만남(좋은 만남)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강도를 만남 사람에게 좋은 만남을 제공한 사마리아인에게는 강도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이 가지고 있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10:33).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강도들과 제사장, 레위인에게는 없는, 오직 사마리아인에게만 있는 마음이다. 바로 이 마음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살리는 좋은 만남을 제공한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반면 강도들에겐 이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빼앗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의 죽도록 때린 다음 버리고 간 것이고, 제사장과 레위인 역시 이 마음이 없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돕지도 않고 피하여 지나간 것이다. 이와 같이 결국 사람의 차이는 마음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지난주일 넓고 큰 마음리모델링의 방법으로 주님의 마음을 닮는 것, 혹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의 마음, 우리가 품어야 할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어떤 분은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세상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 혹은 사람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렌즈라고 했다. 세상을 바라보시고, 사람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에 눈물이 항상 마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닮아야 할 마음, 품어야 할 마음이 세상과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라고 한다. 단순히 내장이 뒤틀리다.’는 뜻이지만나중에는 ‘동정심이 일어 마음을 움직이다.’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다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볼 때 마치 몸 안에 있는 모든 장기가 심하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애틋한 동정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한 마디로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이다. 이 단어는 공관복음에서만 12(9:36, 14:14, 15:32, 18:27, 20:34, 1:41, 6:34, 8:2, 9:22, 7:13, 10:33, 15:20) 사용되고 있는데한결같이 어려운 처한 이들의 결핍을 알고 채워주려는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이 중에서 9회가 예수님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 주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태도, 혹은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를 채워주신 동기를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 본문도 그 중에 한 사건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치유의 말씀이다. 한 나병환자가 주님을 찾아와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본서의 저자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병자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소개하고 하고 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리라 하시니’(41), 주님께서 그를 치유하시기에 앞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병자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라는 주님의 행동을 첨가하고 있다. 율법은 나병환자와의 접촉을 금하고 있다. 심지어는 인사도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님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런 행동을 보이셨다. 율법을 넘어서는 영혼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걸핏하면 시비를 걸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이 사건을 보고도 잠잠한 것을 보면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할 말을 잃은 것 같다. 무엇이든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은 반대자까지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감동을 주는 법이다. 우리 또한 이런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인 교회와 지체, 그리고 이웃을 섬기자! 우리가 리모델링해야 할 마음은 주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

우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리모델링하려며 어떻게 해야 할까?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 본문에서 주님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이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손을 대시는 행동을 하시도록 만들었다. 나병으로 고통받은 영혼의 부르짖음에 주님께서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을 품게 되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금지된 행동까지 하시며 그를 치료해 주신 것이다.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은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들이 다른 영혼을 무너뜨리는 영혼의 파괴자가 된 것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한 것도 모두가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리모델링하려면 우선 영혼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갖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St. Thomas More)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는 재판정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한 재판관에게 그가 이렇게 말했다. ‘재판관님, 오늘만은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친구여,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미워해서 돌로 쳐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이 예수 믿고 나서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서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손잡고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당신도 예수 믿고 나중에 저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손잡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재판관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이렇게 선한 말을 합니까?그러자 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다보니 주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고, 그래서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까지 품게 된 것이다.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면 그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리모델링하는 첫 번째 방법이다.

 

타인인지 감수성

다음은, 불쌍히 여기다를 히브리어로 하난(חנ)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동정한다거나 단순히 곤경에 처한 사람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의 눈으로 벌어진 일들을 보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해보고, 그의 느낌으로 느껴보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감’(共感)이라는 말과 가깝다. 공감이란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어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를 가리켜 타인인지 감수성이라고도 했다.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십분 고려하며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 다른 사람의 입장을 얼마나 많이, 얼마 자주, 얼마나 크게 배려하고 고려하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공감능력이 큰마음, 혹은 타인인지 감수성이 높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주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지 않고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었는데, 일부러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손을 내밀어 그를 대시며 고쳐주셨다. 주님의 공감능력과 타인인지 감수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친히 사마리아 지역을 방문하시고,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도, 점령군으로 와있는 로마백부장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도, 당시 사회에서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던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려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도 주님의 공감능력과 타인인지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리모델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공감능력을 키우고, 타인인지 감수성을 높일 수 있을까?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역지(易地)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처지나 형편이 되어 보는 것이다. ,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역지견지(易地見之)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다. 역지감지(易地感之)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동해 보는 것이다. 역지행지(易地行之)하는 것이다. 문제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입장으로만 바라보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만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쉽게 판단하고, 갈등이 생기게 된다. 그렇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고, 바라보고, 느끼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갈등이 줄어들고, 오해가 이해로 바뀌면서 공감하게 된다. 이것이 공감능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어떤 의사가 수술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수술실로 달려왔다. 의사를 기다리던 환자의 보호자가 의사에게 노발대발 화를 쏟아냈다.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의사라는 자가 왜 이렇게 늦게 오냐는 것이었다. 외부에 있다가 연락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라 해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의사의 뒤에서 죽으면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고함을 질렀다. 의사는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을 나와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보호자에게 수술은 잘 됐으니 자세한 사항은 담당 간호사에게 들으라고 말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이제는 의사가 친절하지 않다며 화를 냈다. 그때 담당 간호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 우리 선생님의 아들이 어제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장례 중인데도 수술을 하러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둘러 자리를 뜬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화를 폭발하던 보호자가 당황하며 금새 숙연해졌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만 틀림없이 이 보호자는 장례식장을 찾아가서 문상도 하고, 의사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자신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이렇게 분노로 펄펄 끓던 사람이 단숨에 바뀐 것이다. 그것은 생각의 관점, 시각의 관점, 느끼는 감정의 관점, 행동의 관점이 자기중심에서 상대방(의사)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사의 말이나 행동, 태도 모두가 이해가 되고, 공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지가 중요하다. 이것이 공감능력을 키우고, 타인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비결이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시작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가 닮아야 하고, 품어야 할 주님의 마음이다. 세상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이고, 사람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렌즈다. 이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리모델링하자! 그리하여 지지난주 말씀을 드렸던 이웃을 살리는 좋은 만남을 제공하는 주인공이 되고, 주님처럼 병든 세상을 회복하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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